나는 삼 년 동안 지역 뉴스 데스크에서 순환 근무를 했다. 두 주는 낮, 한 주는 밤. 업계는 이 방식을 고정 야간보다 인간적이라고 여겼다. 낮 근무 주에는 보통의 생활 비슷한 것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오히려 그쪽이 더 나빴다고 생각한다. 어느 리듬에도 자리 잡지 못한 몸은 어느 쪽과도 싸움을 멈추지 못한다.
교대 근무가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한 연구는 새롭지도, 너그럽지도 않다. 사람의 몸은 일주기 리듬으로 돌아간다. 빛에 반응하는 뇌의 작은 구조가 주로 조절하는 내부 시계다. 이 시계가 관장하는 것은 졸음만이 아니다. 심부 체온, 호르몬 분비, 소화, 세포 복구가 일어나는 시각까지 모두 그 시간표를 따른다. 야간 노동은 단지 엉뚱한 시각에 깨어 있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 시계에 맞춰진 모든 계통에게 제 지시를 거슬러 작동하라고, 반복해서, 때로는 평생에 걸쳐 요구한다.
적응과 버팀 사이
나도 교대 근무를 해 보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처럼 시간이 지나면 몸이 적응한다고 믿었다. 적응하지 않는다. 적어도 완전히는. 이 대목의 연구는 꽤 분명하다. 수십 년을 밤에만 일한 사람에게서도 일주기 지표는 각성 시간에 맞춰 완전히 뒤집히지 않는다. 비번 시간에 받는 햇빛이, 근무 일정이 덮어쓰려는 시계를 계속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장기 야간 노동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적응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안에서 기능하는 법을 익힌, 영구적이고 낮은 수준의 어긋남이다. 어긋남을 해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 어긋남의 결과는 충분히 기록되어 있어서, 여러 나라의 보건 당국은 장기 야간 교대를 심혈관 질환부터 일부 암까지 여러 건강 결과의 유력한 기여 요인으로 분류한다. 기전을 두고는 논쟁이 이어지지만, 대규모 인구 연구에서 그 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논쟁거리가 아니다. 순환 데스크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다. 밤에 일하는 사람은 이미 안다. 연구가 나중에 확인해 줄 뿐인 방식으로, 그 시간대의 무언가가 급여가 셈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
그런데도 일은 된다. 대가를 몰라서가 아닌 이유로 그 일을 거듭 택하는 사람들이 한다. 야간 수당 때문에 택하는 사람이 있다. 여러 업종에서 그 차액은 교대의 교란만으로 설명되는 수준을 넘는다. 시간대가 정말로 자기 생활에 맞아서 택하는 사람도 있다. 낮의 육아, 두 번째 일자리, 새벽 세 시의 빈 건물과 빈 거리 특유의 고요를 그냥 좋아하는 기질. 이번 호의 다른 기사를 위해 만난 몇 사람은 그 고요를 불평보다 애정에 가까운 말로 설명했다.
여기서 깔끔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야간 노동을 없애야 한다거나, 그 일을 하는 모두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단순한 주장은 하기 어렵다. 물론 분명히 착취인 경우도 있다. 수당이 요구되는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업종들이다. 순환 근무에서 벗어난 지 삼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계속 돌아가는 자리는 더 작고 덜 풀리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는 스물네 시간 돌아간다. 그렇게 돌아가야 하는 경제를 우리가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물네 시간의 매 시각을, 그 교대를 위해 진화하지 않은 몸이 지킨다. 우리는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반 시설을 설계했다. 그것을 돌리는 사람은 그렇게 설계하지 못했고, 그 간극을 더 나은 조명이나 영리한 근무표가 끝내 메울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